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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지는 시인들 / 나금숙
 나금숙    | 2016·05·30 17:08 | HIT : 1,223 |
특집 - 젊은 시인들의 상상세계

기울어져 있는 시인들

  

나 금 숙





1.
장자의 소요유에 보면 오상아(吾喪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상아(吾喪我)는 말 그대로 하면 자기를 살해한다는 뜻인데, 자신을 지속적으로 죽
여나가지 않으면 새로운 이상(異象)을 구축해 나갈 수 없음을 말한다. 자신 속에 있는 타자와 마주치기 위해 가능한 상태가 바로 오상아 상태이다. 근거, 의미, 필연성, 목적, 미리 만들어진 틀을 버린 상태를 말한다. 또한 장자는 제물론의 다른 곳에서 만물은 그렇게 될 만한 이유를 갖고 있고, 원래 긍정할 만한 바탕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어떠한 만물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떠한 만물도 긍정되지 않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 두 가지 갈래를 어떻게 아우를 수 있는가?
자신을 죽이고 비우기에 성공한 사람은 퉁소에 부는 바람처럼 바람이 드나들며 소리를 낼 수 있다. 자신 스스로 자유자재한 공간을 확보하고 타인을 지배하려는 의 지가 없는 사람의 상징이다. 자기를 버렸지만 자기를 통해 무엇이든 창조해낼 수 있는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옥타비오 빠스도 말했듯이 산다는 것은 오히려 죽는다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것은 모두 그러한 것처럼, 죽음이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삶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 삶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삶을 완성시킨다. 산다는 것은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 낯선 것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며 이러한 전진은 우리 자신, 우리 안의 낯선 타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이 낯선 타자가 실은 그들의  상상세계 속에서 울고 웃고 춤추고 노래하는 만물들인 것이다. 유구한 세월동안 시인들이 추구해온 이 세계가 어떻게  요즘 시단, 특히 젊은 시인들에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주목해 보았다. 왜냐하면 상상세계라는 그 영토가 바로 자신이 끝나고 자신이 비워진, 자신이 죽어버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하층부에 살도록 운명지어진 시인은 고독하다. 익숙하고 고착된 자신의 고향에서 이미 추방된 자들이다. 개인의 정체성이 기계 산업에 함몰되어버린 시대에서, 특히나 시작(詩作)은 노동가치로 환산되기는 어렵다. 사회적 현실을 무시한다고 비난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시인들은 “우리는 쓰는 것이 이미 현실 참여다“라는 칸트의 말에 지지를 얻는다. 시인의 당대성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상상세계를 언어로, 랑그와 빠롤로 보여줌으로 시인의 사역은 다하는 것인가? 생각되어지고 상상되어지고, 쓰여지고 노래되고 극화되기도 하는 시들, 이 과정에서 어디서 어디까지를 시라고 볼 것인가? 질문은 준비된 답보다 창의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던져본다. 그 답을 우선 들뢰즈가 베이컨의 그림을 바탕으로 쓴 예술미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같은 맥락에서 다른 창문으로도 들여다보고자 한다.

2.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들뢰즈는 예술을 감각 존재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들뢰즈의 정의에는 예술이 기존에 취급되어 온 방식에 대한 거부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예술을 그것을 만들어낸 주체의 반영으로 취급하는 것과, 둘째는 예술을 지시대상, 즉 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 둘은 예술을 재현으로 보는 방식으로 한데 엮어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이어져온 고전적 예술론에서 예술은 재현이다. 플라톤은 예술을 이데아의 모방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이『국가』에서 제시하는 ‘침대의 비유’를 살펴보면, 침대를 생산하는 데에는 세 단계의 방식이 있다. 그 중 최상의 단계는 신적인 생산 방식으로 침대의 이데아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때 침대의 이데아란 침대의 지성적 원리로서 모든 침대에 공통되는 원리를 말한다. 두 번째 단계는 목수에 의한 생산 방식으로 현실적이고 실재적인 침대를 생산하는 것이다. 목수는 이데아를 바탕으로 해서 침대를 생산하고 있다. 세 번째 단계는 화가에 의해 침대의 그림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적인 생산 방식이다. 목수의 생산 방식이 이데아를 모방한 방식이라면, 화가의 생산 방식은 목수의 생산을 모방한 것이기에 ‘모방의 모방’을 하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화가의 예술적 생산 방식은 이데아-원형으로부터 가장 멀고, 실질적이지도 유용하지도 않은 것이며 진리에서 그만큼 멀어지는 가장 하위의 것이다. 그는 회화 뿐 아니라 문학도 낱말과 구문을 가지고 모방의 모방을 하기에 마찬가지로 본다. 또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던 이들이 문학작품의 등장인물들에 빠져 수동적 정념을 공유하게 되며 이것이 정치적인 혼란, 무질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예술의 본질은 모방이라 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모방으로서의 예술을 긍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을 통해 배움과 즐거움을 얻는 것을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 본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사물을 자세히 그린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즐거움도 이때문이라고 한다.
『시학』에서는 “시인은 화가나 기타 조형 기술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방 기술자”라고 보며 이 모방 기술자는 기본적으로 어떤 행동(praxis:목적을 향한 행동을 의미)을 하는 사람을 모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책에서 시인의 일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는 역사가가 하는 일이다. 시인의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문학에서 모방이란 실재의 충실한 복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을 거친 재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현으로서의 예술론은 20세기의 리얼리즘에까지 이어진다. 루카치는 재현, 모방을 예술의 토대라고까지 이야기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러한 재현으로서 예술론과 단절한다. 예술이 어떤 주체와 대상과 관련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주체의 표상 능력이 아닌 감각과 관련 하에서이다.
이때 감각이란 무엇인가?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베이컨의 회화를 분석하면서 감각에 대해, 감각이란, 쉬운 것, 이미 된 것, 상투적인 것의 반대일 뿐만 아니라, ‘피상적으로 감각적인 것’이나 자발적인 것과도 반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감각은 신경 시스템, 생명의 움직임, 본능, 기질 등 자연주의와 세잔 사이의 공통적인 어휘처럼 주체로 향한 면이 있고, 일, 장소, 사건처럼 대상으로 향한 면도 있다고 말한다. 감각은 주체와 대상 어느 쪽도 아니며 둘 사이의 공통적 사건이다. 당신이 타인의 손을 잡았을 때의 감각을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각각을 각각으로 분리하면서도 일어나는 공통의 일, 공통의 사건이다. 감각은 주체와 대상보다 일차적인 것으로 둘을 구분 불가능하게 하는 지점이자 공통의 신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감각은 수동적인 것, 능동적인 것도 아니며 무엇의 재현일 수 없다. 그래서 현상학자들은 이 감각을 “세상이 있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주체와 대상 모두와 관계하면서도 주체나 대상, 어느 하나로도 환원할 수 없는 이 감각, 이러한 감각 존재를 스스로 세우는 일이 예술이 하는 일이다. 재료들(문학에서는 언어들)을 거치면서 표현되는 예술은 이 재료과 함께 “조형적 혹은 선율적 풍경들을, 리듬적 인물들”을 끌어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미학적 형상들이라 할 수 있다. 감각 구성물에서 이야기했던 비인간적 풍경, 비인간적 되기(devenir)와 관련된다 할 수 있다. 미학적 형상에서 중요한 것은 이 비인간적 풍경과 비인간적 되기가 생성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들뢰즈가 미학적 형상을 감각적 생성, “다른 무엇으로-생성 되어가는 행위”와 연관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들뢰즈의 형상 개념을 살펴보면, 『감각의 논리』에서 들뢰즈는 베이컨의 말을 인용하며 형태(구상)와 형상을 구분한다. “베이컨은 감각으로 환원되는 형태(형상)는 그것이 재현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대상으로 환원되는 형태(구상)의 반대라고 말한다.” 구상은 앞서 살펴보았던 재현, 표상이며 이는 언제나 구상의 총체 속에서 이미지를 어떤 대상으로 되돌리거나, 어떤 스토리를 말하게 한다. 하지만 형상은 감각으로 “감각이란 이야기할 스토리를 통해 우회하거나 번거로움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감각들의 층리의 이동을 담아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형상은 이미 움직이는, 생성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복수 감각의 이동을 담아내는 형상들을 구축한다. 들뢰즈가 이를 ‘선율적, 리듬적’이라고 했을 때 이는 감각의 이동의 선율, 리듬을 일컫는 것이다. 이것이 생성 그 자체가 일인 형상, 즉 미학적 형상이다.
  들뢰즈는 예술에서의 감각 구성물을 ‘재료, 비인간적 풍경, 비인간적 되기’라는 세 가지로 제시한다. 먼저 감각은 재료와의 관련 속에서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학적 형상은 재료들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구성의 구도를 통과해야 한다. 재료들만이 우연적으로 놓여있다고 해서, 미학적 형상은 구축되지 않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혹은 광인이 그린 그림이, 써놓은 글이 아무리 감각적일지라도 우리는 이를 예술이라 하지 않는다. 여기에 구성의 구도의 문제가 놓여 있다. 이러한 구성의 구도를 들뢰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살-집-우주의 구도”로 설명한다. 감각의 구축은 살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집 혹은 골조물을 필요로 한다. 이는 감각에 “스스로 자율적인 틀들 안에서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는 것들”이다. 이때 집을 정의하는 것은 면들로서, “앞면과 뒷면, 수평과 수직, 왼쪽과 오른쪽 면들, 수직과 경사면들, 직각면 혹은 곡면들……과 같이 살에다가 그의 골격을 부여하는, 여러 방향으로 향해진 면들의 조각들”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이 면들을 부수거나 절단하거나 결합시키는 것을 우리는 구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집과 더불어 다른 하나가 더 요구되는데 그것은 세계, 우주이다. 구도들이 세계, 우주라는 무한으로 이어질 때야 비로소 살 혹은 형상은 집의 거주자로서가 아닌 “집(생성)을 떠받치는 우주의 거주자”가 된다. 이 무한으로의 탈영토화 속에서 “살은 감각 구성물 안에서 사라져버리는 발현자”로 스며들면서 이때야 비로소 감각 존재는 살이 아닌 “우주의 비인간적인 힘들, 인간의 비인간적 생성들의, 그리고 그것들을 교류시키고 조절하며 바람처럼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양가적인 집의 구성물”로서 열림의 무한성 속으로 나아가게 된다.
  들뢰즈는 ‘살-집-우주’의 구도 속에서 예술의 목적이 “감각의 블록을, 하나의 순수한 감각 존재를 추려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우선 화폭을 점유하는, 흰 종이를 차지하고 있는 구상적인 것들, 판에 박힌 것들을 지워내는 작업을 요구하며 그제서야 감각 존재인 예술은 스스로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들에게 놓여있는 가장 힘든 일은 기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감각 존재를 홀로 서게 하는 일”이다. 이는 그들이 어떻게 구상적인 것, 재현적인 것들과 단절하는 방법을 세우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폭이 아닌 언어로 이루어지는 시인들의 상상세계의 영토도 마찬가지로 바구상적인 것과 재현적인 것들을 과감히 버릴 때 얻을 수 있다. 여기에 장자의 오상아(吾喪我)가 필요한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업적에 대한 쓸모없음을 견딜 줄 알아야한다. 이른바, 감시와 처벌 기관인 감옥을 오히려 교육장소로 삼아 공리와 쓸모 있음을 추구했던 벤덤으로부터 현대가 물려받은 것은 누군가에게 아니 서로가 주목당하고 감시당하는 시놉티콘 뿐이다. 들뢰즈가 말한 감각의 블록이 선율과 리듬을 얻어 이동할 때, 그것은 벤덤이 생각한 공리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현실 세계에서는 무용한, 무가치한 것이다. 여기서 더 들여다보면, 벤담 이후 폴라니가 짚어낸, 효용 중심의 기계화된 산업사회의 폐해는 자연의 일부였던 상상력, 즉 “감각”을 소유했던 인간을, 한 기업의 공장이나 회사의 부품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자기조정 시장, 시장경제라는 개념도 기업 논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렸다. 이 때, 필연코 등장하게 되는 파시즘은 상상세계의 자녀인 시의 영역까지 점령해버렸다. 인간이 이미 하나의 물건,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되는 사회, “악마의 맷돌”로 갈아서 분자화 시켜버리는 사회에서 무용한 시인들의 상상력, “감각”은 과연 시대와는 별도인 유한가치인가? 이 프레임에서 저 프레임으로 건너가는 사이에 끼어 시인들은 몸을 곧추세우려 애쓰기도 하지만, 그 간극을 건너가는 몸짓인, 위태함을 견디는 그들의 기울어짐은 얼마나 싱싱하고 아름다운가?  



3.
시간에도 감정이 있다는 걸 알았다.
 
감정은 신이 아니었지만

태엽을 감을 적마다
시계를 차고 사우나에 들어가면
자꾸만 바라는 게 생긴다
 
태어나자마자 청춘이었던 사람은
어떻게 생일을 챙겨 줄까?
 
에덴의 뱀을 둘둘 말아
태엽을 만들면
아담과 이브는 알람을 맞췄을 텐데.
 
선악과가 먹고 싶은 시간,
하느님 몰래
산책하고 싶은 시간.
 
창세기는 오전 7시 30분부터
    - 기혁,「물질과 기억」전문


시인의 상상은 들뢰즈가 말하는대로 “감각”을 구축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적인 틀인 “골조물”을 시계라는 물질로 삼고 거주할 집의 거주자만이 아닌, 우주의 거주자가 되는 길을 태초의 창세기에서 얻고 있다. 시인의 감각은 리듬과 선율을 얻어 현실에서 창세기로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이동이 그에게 효용가치가 어떠한지를 따지지 않고, 태초라는 시간을 현존하는 팔목시계의 시침이 가리키고 있는 “오전 7시 30분”에 머물게 하고 있다. 조물주만이 할 수 있는 시간의 시작을 생애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꿰어맞추는 장쾌함을 시인은 즐기고 있는 것이다. 상식이나 이미 정립된 개념을 살해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무한한 창조본능이다. 데카르트 시대에 시계 제조는 다른 자동기계의 모델이 되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치차(齒車)와 태엽으로 구성된 기계‘로 보았으며 더욱 확대하여 인간에 비유하였다. 일찌기 생명과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데카르트의 신체와 기계에 대한 사고가 라깡, 들뢰즈, 가타리에 이어 작금의 문학 이론 뿐 아니라 문학비평과 시인, 작가들의 글쓰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문학의 효용가치는 큰 관점에서 볼 때, 현실에서도 그 가치가 무한하게 잠재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나“라는 욕망하는 기계가 갖고 있는 고정된 프레임을 깨기 위해 시인은 오늘 또 죽는다.  ”에덴”의 뱀은 인류를 타락시킨 원인 중 주요 텍스트인데, “둘둘 말아” 아담과 이브의 달콤한 약속 시간을 알려주는 알람으로 생성되고 있다. 그래서 이미 박제되어버린 에덴의 전복을 꿈꾸는 새로운 이 시인의 시계는 “오전 7시 30분”에 새로 첫 역사를 쓴다. 정언명령을 거절하는 배반의 선, 악, 지식 나무에서 자신의 열매를 따내고자.....
 

 
계단이 사라졌다
놀라지 않는다 계단이란 종종 사라지곤 하니까

곧 계단 위의 집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는다
태연한 이곳에서
내가 산 적이 있긴 한 걸까
 
다른 곳에서
집이 나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유리창 밖으로 부풀어 오르던 불빛도, 옥상에서 펄럭이던 세월도, 시간을 붙잡아둔 몇 개의
액자도 모두 사라졌는데
 
눈이란 믿을 게 못되지
 
분명
이 근처에 계단이 놓여 있을 거야 저 높이에 창문이 매달려 있을 거야 그 위에 붉을 지붕이
있을 거야
 
희망은 순식간에 한 채의 집을 짓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밥을 짓고 여기가 몇 번 째 집인지 묻지 않고
잠든다

얼마 전까지 황무지였고 잠시 집이었으며
다시 허허벌판이 될 이곳에서
 
  - 유병록,「분명 이 근처에」전문
 


기혁 시인과 달리 유병록 시인은 장소를 가지고 감각을 구축하고 리듬과 선율을 얻으며 아
무 거리낌 없이 이동하는 미적 형상을 얻어낸다. 계단이란 말이 주는 무한대한 상상력과 “감각”을 마음껏 운용한다. 있다가 사라진 계단, 아마 그 계단은 야곱이 꿈 속에 보았던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던 그 계단은 아닌지? 분명히 내리락이 아니고 오르락이 먼저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천사는 야곱과 같이 있었으니까.... 계단을 가져 온 시인의 천사도 먼데서 온 것이 아니고 그의 탄생, 아니 탄생 이전부터 같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인은 오르락 내리락하던 “계단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아마도 짝사랑하던 소녀가 그 계단 위 이층집, 아니면 계단 위 제비집 같은 옥탑방에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 소녀의 이주와 함께 계단도 사라졌다.“이곳에서 내가 산 적이 있긴 한 걸까” “계단 위의 집도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을 때, 계단은 시인의 세계를 붕괴하거나 생성시키는 얼룩이며 잉여물이며 타자이다. 인식 세계 속으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인, 이해할 수 없는 시인의 ‘계단’은 '사물'(The thing)이 된다. 내가 살았던 그러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도 하는 계단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인 동시에 여전히 낯선 '이방인'이다. 라캉의 말대로 이 '타자는 나의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낯섬'이다.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반점」(The Birthmark)이란 소설에서 아일머가 제거하고자 하는 조지아나의 반점은 단순히 지워지거나 배제될 수 있는 흔적이 아니다. 뺨의 반점은 그것이 심장에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물'이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위해 제거하고자 하는 얼룩이 사실은 아름다움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인 것이다. 반점이 제거되는 순간 아일머는 완벽한 미를 만들어 내었다고 기뻐하지만 아내는 죽는다. 반점은 제거되어야 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또한 낯섬은 체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얼룩인 동시에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다. 타자는 동일시를 가능하게 하는 이미지나 상징적인 재현 체계가 아니라 대상화될 수 없는 '사물'이다. 그것은 상징적 교환 체계 '속'에 들어와 그 체계 자체를 망가뜨리는 잉여물이자 얼룩이다. 재현의 눈을 피하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다 .여기서 ‘계단’이라는 ‘사물’, ‘얼룩’은 황무지요 집이요 허허벌판으로 블랙홀처럼 중첩되고 퍼져나가는 시인의 프랙탈 구조의 사유의 번짐이다. “태연한” 근처 “이곳에서” “허허벌판”으로 확장되는 사유의 중심에 수직 상승하는 “계단”이 있다. 언어로 이루어내는 시인의 상상세계의 입체성이 이만하면 어떠한가?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제일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만은 철로는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
내며 자기를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기차가 아무리 짓밟고 가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잘리지 않는 건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무 것도 없어서

손가락을 잃은 기타리스트는 알지 흉측한 음악을 만들 바에야
약을 먹고 죽는 게 낫다는 걸
발가락이 없는 애벌레는 알지 발가락이 없으면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봐야 한다는 걸

말하자면 비시각적 음표들의 시각적 극대화
     (중략)
잠시 동안의 짧고 굵은 경악과 모든 최대화에 따르는
극심한 부작용, 그때마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긴 열차 한 대가 빨려
들어오는 느낌, 결국 일망타진 당하고 마는 느낌을
   - 황유원, 「세상의 모든 최대화」부분

그렇다. 나라는 몸, 즉 기차의 화물칸인 나의 몸에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일렉기타 한 만대쯤으로 싣고 간다. 전원이 없이는 노래할 수 없는 일렉트릭 기타의 비운, 달리는 기차에서 그는 절대로 노래할 수 없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애벌레처럼 이미 없어서 그는 잘라질 것이 없다. 싫든 좋든 이미 오상아(吾喪我)의 경지에 든 것이다. 그러나 이 자기 살해, 새로운 세계로의 전입 조건인 죽음의 경지는 한번 얻었다고 그냥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지속적으로 견뎌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고행이 아니라  “비시각적인 음표”들이 “시각”화되는 과정으로, “보여줌”의 극대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다른 서신서에서 말하듯이...... 모든 것이 “짧고 굵은 경악”과 함께 “일망타진 당하고 마는 느낌”은 마치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긴 기차 한 대”, 우주 한 층이 빨려오는 막강한 느낌이다. 이 시인은 개인의 비극을 일렉기타와 기차라는 강렬한 미학적 형상을 통해 자신만의 우주를 집대성할 뿐 아니라 그 비극성을 끝없이 확장하고 극대화하여 모두가 올라탈 수 있는 리듬으로 선율로 빨아들이고 있다. 그 극대화의 끝은 이미 죽음이며 이 철로 위에서 죽음과 탄생, 혹은 죽음과 부활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하여 있다. 눈앞의 효용가치만을 따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하여 튕길 수 없는 기타, 언젠가 미친듯 포효할 수 있는 기타를 만대쯤 가슴에 품고 가다 보면, 이 철도는 지구를 몇 바퀴 돌아 상상세계라는 은하에 도달할 것이다. 이 멋진 상상세계로 하여 황유원 시인은 2015년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


나는 핏기가 남아 쓰는 도마와 반대편이란 말을 좋아해요

오늘은 발목이 부러진 새들을 주워 꽃다발을 만들었지요

벌겋고 물컹한 얼굴들
빠끔거리는  이 어린 것들을 보세요
은밀해지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나의 화분은 치사량의 그늘을 머금고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창밖엔 지겹도록 눈이 옵니다

나는 핏기가 남아 있는 도마와 반대편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오늘은 발목이 부러진 새들을 주워 꽃다발을 만들었지요

벌겋고 물컹한 얼굴들
뻐끔거리는 이 어린 것들을 좀 보세요
은밀해지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나의 화분은 치사량의 그늘을 머금고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창밖엔 지겹도록 눈이 옵니다

나는 벽난로 속에 마른 장작을 넣다 말고
새하얀 몰락에 대해 생각해요
호수, 발자국, 목소리……

지붕 없는 것들은 모조리 파묻혔는데
장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담장이 필요한 걸까요
초대하지 않은 편지만이 문을 두드려요

빈 액자를 걸어두고 기다려보는 거예요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물고기의 비늘을 긁어 담아놓은 유리병속에
새벽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별들은 밤새도록 곤두박질치는 장면을 상연 중입니다

무릎을 켜면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당신이 이 편지를 받을 즈음엔
나는 샛노란 국자를 들고 죽은 새의 무덤을 휘젓고 있겠지요


*고트호브: 그린란드의 수도로 '바람직한 희망'이라는 뜻.

  - 안희연,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안희연은 요즘 주목받고 있는 젊은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샛노란 국자를 들고 죽은 새의 무덤을 휘젓고 있“다니! 이 발칙한 상상력은 그녀의 나이가 불꽃처럼 타오르다 간 실비아 플라스가 자살한 나이와 비슷하기 때문일까? 첫 행에서부터 물고기를 난도질한 흔적이 역력한 ”핏기가 남아 있는 도마“가 우리를 정”반대편“에 있는 그린란드로 이끌고 간다. 그린란드란, 그 곳의 “고트호브”란 시인의 이상향이거나 꿈속에만 가보는 네버랜드일 것이다. “발목이 부러진 새”나 “벌겋고 물컹한 얼굴들 뻐끔거리는 어린 것들”에 대한 시인의 무의식의 반사작용은 그 애달픔을 “은밀해지기란 쉽다”라고 역설을 말하게 한다. 그들은 시인의 상처받은 자아이다. 그러나 “치사량의 그늘을 머금고도 잘 자라고”있다. 그러므로 “지붕 없는” 낮은 것들은 “모조리 파묻혔”지만, “장미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담장”과 “초대하지 않은 편지”와, “빈 액자”와, “물고기의 비늘을 긁어 담아놓은 유리병”은, 욕망하는 기계로서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로서 더 많은 리좀을 생산하려는 시인의 의지이다. “별들이 밤새도록  곤두박질 치는 장면”이야말로 평면뿐 아니라 중심과 깊이로 힘차게 뻗어나가는 리좀 모델을 연상하게 한다. 시인의 상상세계 속에서 “고트호브”는 단독이 아닌 타인과 복수체계로서 동거하게 하는 현재 내지는 미래의 장소인 것이다.



숲의 나무보다 많은 새들이 있고 부리에 침묵을 물고 있고
그보다 많은 잎들이 새를 가리고 있고

수십 명의 아이들이 지거나 이기지 않고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숲을 통과하고 있고
끝도 모른 채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수십 명의 나무꾼들은 수백 번의 도끼질을 할 수 있고 
수천 그루 나무를 수만 더미 장작으로 만들 수 있고
빛은 영원하다는 듯이 장작을 태울 수 있고
장작은 열 개비가 적당하고 그 불이면 영원도 밝힐 수 있고

아이들이 영원을 지나가고 있고 별들이 치찰음을 내고 있고
밤과 낮은 서로에게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고 있고
불앞에서 나무꾼들은 수십 개의 그림자를 벗으며 농담을 하고 있고
인간의 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불 그림자가 불의 주변을 배회하며 불 그림자를 만들고 있고
새들은 여전히 침묵을 부리에 물고 있고

나무 위에서 열쇠들이 쏟아지고 있다
나부라진 옷가지들이 발자국을 가리고 있고
나무꾼들은 횃불을 나눠들고 더 어두운 곳으로 움직이고 있고
잎이 풍경을 가리며 무성해지고 있고  

   - 송승언, 「철과 오크」전문

송승언 시인도 앞의 안희연 시인과 비슷한 연배이고 등단도 비슷한 시기에 했는데,
이미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 그의 시는 하나의 축조물과 같다는 평을 듣는데, 그의 상상세계가 어디로 뻗어가 있는지 궁금하다. 여러 시편이 있었지만 첫 시집 제목이기도 하고, 요즘 내가 광물질에 매혹되어있는 터라 얼른 이 시를 선정했다. 어쩐지 전쟁과 평화를 연상시키는 이 시의 제목처럼 시 속에서는 두 세계의 대조가 뚜렷하다. 뚜렷하나 어조가 강팍하지 않고 고요한 심성을 가진 어린 철학자처럼 고요하다. 언뜻, “헨젤과 그레텔”이 손을 잡고 이 시 속의 숲을 지나가는 듯한 환영이 스친다. “피리부는 사나이”가 피리를 불어, 거짓말만 하는 어른들의 마을에서 아이들을 이끌고 여기를 지나가는 것 같다. 아버지의 망령을 만나고 온 “햄릿”이 “오필리어” 와 나란히 이 숲의 입구에 앉아 고요한 물그림자를 바라보는 것 같다. 묘하게 갈등 구조를 느끼게 하면서도 시는 우리를, 북구 가정의 반조명 엔틱 식탁에 앉아 있는 듯한 편안함과 안도감을 준다. 더 이상 일을 안해도 될 것 같다. 곧 따끈하고 구수한 스프가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나올 것 같다. 지금부터 아무 일도 안해도 될 것 같다. 갑자기 이 글도 더 쓰고 싶지 않다. 눈치 챘는가? 젊은 시인들이 상상하는 그 나라는 지금 우리들의 무릎 앞의 담요처럼 가까이 떨어져있다. 거기에 우리는 분깃이 없는가? 아니다. 철과 오크의 정신으로 살아온 앞선 시인들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나는 이 시인을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 느낌을 교유한다. 비평도 감상도 필요 없는 아름다운 시를 만나서 깊은 속에서 우러나는 충만감에, 한 사람 더 쓰려고 했던 글을 여기서 마치려고 한다. 안주하려고 허리를 곧추세우려는 노력보다 여기서 저기로 넘어가려고 기우뚱 기울어지는 시인들을 눈으로 가슴으로 사랑할 것이다. 오래 지난한 시의 길을 달려와 지금 우리의 면전에서 웃는, 맑고 투명한 젊은 시인들의 영혼들을 대하니 가야할 먼 길이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새들은 여전히 침묵을 부리에 물고 있고, 나무 위에서 열쇠들이 쏟아지고 있”으니까...... 그 “침묵”과 “열쇠”는 오늘과 장래에 젊은 그들의 것이다.




참고 서적;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이정임·윤정임 옮김,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1995.
질 들뢰즈, 하태환 옮김, 『감각의 논리』, 민음사, 2008.
아리스토텔레스 외, 천병희 옮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문예출판사, 2004.
이상섭,『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연구』, 문학과지성사, 2002.


나금숙
전남 나주 출생, 2000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레일라 바래다주기> 외 1권,
‘빈터’동인,「시와 문화」 편집위원



「시와 문화」2016년 봄호 발표





  
295   고영민 시집 <구구>  이성목 16·07·02 1343
294   노혜경 시집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이성목 16·07·01 1324
293   정한용 시집 <거짓말의 탄생>  이성목 16·07·01 1218
292   최기종 시집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이성목 16·07·01 1218
291   김승기 시집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목 16·07·01 1198
290   김충규 시집 <아무 망설임 없이>  이성목 16·07·01 1225
  기울어지는 시인들 / 나금숙  나금숙 16·05·30 1223
288   시집 아케이드_김명은 시집 󰡔사이프러스의 긴 팔󰡕  김명은 16·05·12 1202
287   정영선 시집 <나의 해바라기가 가고 싶은 곳>/김정수  김정수 15·12·29 1301
286   노혜경 시집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김정수  김정수 15·12·29 1351
285   장인수 시집 <교실, 소리질러> 서평 / 나금숙  나금숙 15·12·23 1266
284   홍일표 시집 <밀서> 서평 / 나금숙  나금숙 15·12·23 1297
283   이현승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김정수  김정수 15·12·02 1283
282    홍일표 시집 <밀서>/김정수  김정수 15·11·13 1339
281   김하경 시집 <거미의 전술>/김정수  김정수 15·10·28 1299
280   김황흠 시인, <숫눈>/김정수  김정수 15·10·15 1279
279   이운진 시인,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김정수  김정수 15·10·15 1319
278   김명철 시인 <바람의 기원>/김정수  김정수 15·10·15 1264
277   이화영 시인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김정수  김정수 15·10·15 1195
276   <게천은 용의 홈타운> 최정례 시인 시집 서평 / 나금숙  나금숙 15·09·06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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