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터문학회-온&오프

 

     

 

 

 

 

 

 

 

 

 

 

 

 

 

 



  동인 발표작&신작시

  작품집 출간 소식

  해외 빈터로 부터

  동인 이벤트홀

  사진으로 만나는 빈터

  빈터 동인들



[김명은 / 나를 울린 한 편의 시] 포 - 애너벨 리
 김명은  | 2009·08·04 11:43 | HIT : 2,613 |
애너벨 리

                   에드가 앨런 포


머나먼 옛날, 아주 오래전
어느 바닷가 왕국에
애너벨 리라는 소녀가 살았지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내게 사랑받는 것밖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


나도 어렸고 그녀도 어렸지만
그 바닷가 왕국에서
우리는 사랑을 초월하는 사랑을 했지
나와 애너벨 리는,
하늘의 날개 달린 천사들조차도
우리를 질투할 만큼.


그래 바로 그것이 이유였지
이 바닷가 왕국에
어느 날 구름 속에서 바람이 일더니
내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만든 것은.
그래서 그녀의 고귀한 친척들이 내려와
그녀를 빼앗아 무덤에 가두어 버렸지
이 바닷가 왕국에서.


우리 반만큼도 행복하지 못했던 하늘의 천사들은
그녀와 나를 질투했던 거야
그래! 바로 그게 이유였어
이 바닷가 왕국에서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래서 구름 속에서 밤바람이 일더니
내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죽였던 거야.


하지만 우리 사랑은 그 사랑보다 더 강했지
우리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보다
우리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의 사랑보다.
하늘의 천사들도
바다 밑 악마들도
내 영혼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떼놓을 수는 없었지.


그래서 달빛이 찾아들 때마다 나는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고
별이 뜰 때마다 나는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동자를 느낀다
밤바다에서 나는 내 사랑 곁에 눕는다
내 사랑, 내 인생, 내 신부 곁에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파도치는 그녀의 무덤에서.



*****************************************************


  이 시를 마지막으로 책을 접고 집을 떠난 지 보름이 지났어요. 평소 슬픈 동화 같은 이 시가 두루마리 화장지를 둘둘 말아 콧물까지 풀어대게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문학의 마력, 도무지 난다 긴다 하는 시조차 울림이 되지 않은 날이 여러 달 째었죠. 남쪽바다를 향해 내려가 보기로 한 그 밤,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왜 삶이라든가 목숨이라든가 사랑 같은 것이 간절해지기는커녕 갈수록 하찮고 시시해지는지, 붙박여 있는 거울을 바라보면 왜 내가 보이지 않은지 그 시선은 볼 때마다 금세 피로해지는지, 가빠지는 호흡은 자꾸 바깥문을 열어주고 방향을 틀어 나를 나가게 하는지, 흐릿한 글씨처럼 날씨처럼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개운치 않은 앞뒤를, 위아래 사방 명치끝을 꽉 틀어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숨겨두기에는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불안한, 팽팽해질 대로 팽팽해진 공기 같이 위험했죠. 한 달을 작정하고 천 리가 넘는 길을 떠났지요.


  당신, 감꽃 지고 떫은 풋감이 해골처럼 툭 툭 떨어지는 소리 속으로 들어가 보실래요? 늙은 감나무가 보이는 그 집에 들어서면 양쪽 뺨 위에 기미가 조금 낀 젊은 여자가 손짓하죠. 시원한 감나무 그늘 밑으로 당신 손을 잡아 끌어들일 거예요. 굵은 빗방울이 가장 낮게 빛나는 커다란 별 속에서 쏟아지는 밤이라면, 모두가 잠들어 있는 거실을 살금살금 걸어 나간, 젖은 몽돌처럼 윤기 난 작은 엉덩이를 가진 그녀의 뜨거운 키스 세례를 받아야할 거예요. 메타쉐콰이어 사이로 버스들은 긴 여름을 싣고 달리죠. 붉은 칸나와 열기를 띤 해바라기, 배롱꽃이 피기 시작하는 길, 수줍고 말이 없는 강을 따라 휘돌고, 그리 높지 않은 벼랑 위에서 보았던 섬에서 비바람을 만난다면 몸부림치는 우산을 펼쳐들고 당신은 당신의 남자다움을 힘껏 과시해도 좋아요. 그녀와 함께하는 며칠 동안은 절대적인 고립감 따윈 느끼지 못하죠. “지구의 크기를 당신은 아십니까? 빛이 머물고 있는 곳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암흑의 장소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욥기)  칼세이건의 “코스모스”본문 중 우주의 바닷가에서 나오는 구절이죠. 이런 고상한 밑천이 다 떨어질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돼요. 바닷가 끄트머리 모퉁이를 끼고 걷는 동안 풍경에 취한 그녀는 두고두고 고마워할 거니까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당신 곁에 앉은 그녀가 어린 아이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다면, 수국 꽃잎처럼 변하는 색다른 미소가 당신 두 귀 사이를 떠돌 거예요.  오래지 않아  그녀는 푸른 풋감처럼 빠른 속도로  떨어질 테니까요.


  동백나무 울타리 안은 통화권 이탈. 변덕쟁이 연인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 같은, 더 이상 만날 필요가 없는 그 이유를 인식하게 되었는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무감각해진 얼굴로 다시 포의 시를 읽어요. '풍경보다 훨씬 더 멀리 있는 죽음을 늘 자신의 배경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장그르니에 말처럼, 하늘에서 바다까지 드러나는 모든 것은 매일매일 낡아가요. 죽어가요. 고개를 쳐들고 눈을 감고 있어요. 잔인하지만 나는 나를 지탱해주는 원초적인 에너지가 아직 필요해요. 가을 해남 은적사 비로자나불 한 번 보러가요. 비로자나불은 산스크리트어로 '태양'을 의미한다죠. 거기 속 시커멓게 타버린 태양이 하반신이 마비된 채 앉아있고, 검은 곰 같은 어미 개가 까만 강아지 두 마리를 낳아 기르고 있어요. 자판 위에 올려놓은 그을린 팔뚝, 악착같이 앵앵거리던 모기떼의 흔적이 반바지 아래쪽으로, 벌레라면 끔찍이 싫어하는 내 몸 갈색피부에 여기저기 살아있는 붉은 꽃잎처럼 달라붙어 있어요.




* 빈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3-05 09:51)
  
  [김혜선 / 나를 울린 한 편의 시] 복효근 - 석쇠의비유  김혜선 09·08·11 2742
  [박미라 / 나를 울린 한 편의 시] 로랑생 - 잊혀진 여인  박미라 09·07·19 3578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GGAMBO

 

 

 

 

 

 

 

 

 

  COPYRIGHT ⓒ 2000 - 2018  POEMCAFE.
   ALL RIGHTS RESERVED.